나의 별명 극복기

 
 
나의 별명 극복기
 
 
 
 
내 이름은 리온입니다. 이로울 리에 따뜻할 온. 세상에 이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지요.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부를 때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부릅니다. 컴온, 컴온 베이비. 그 이유는 바로 라는 나의 성 때문입니다.
이리온.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 게 너무 싫어서 이름을 바꿔달라고 부모님을 얼마나 졸랐는지 몰라요. 이 마음은 스탑보이 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런데 요즘 나는 내 이름, 별명 다 마음에 들어요. 친구들이 그렇게 놀려도 아무 말 못하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4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께서 내일 장기자랑을 할 테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준비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안 하는 사람은 따로 벌을 줄 거라는 말도 덧붙이셨고요. 잘 생각해보면 뭐든 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없던 장기가 하루 만에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뭘 보여줘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부모님은 집에 안 계시고, 집에 계시는 할머니는 뭘 해도 좋다고만 하시니, 결국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학교에 갔어요.
 
드디어 장기자랑 시간이 돌아왔어요. 앞에 나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박수가 아깝지 않을 만큼 멋졌어요. 아이돌 춤은 물론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든 친구들이 합주를 했고,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는가 하면 지하철 노선도를 다 외우는 친구도 있었어요. 차례가 다가올수록 입이 마르고 식은땀이 났어요. 나도 잘해서 친구들의 박수를 받고 싶은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다음 차례는 이리온.”
친구들이 박수를 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앞으로 나갔어요. 몇 걸음 안 되는 잠깐 동안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지 앞에 앉은 친구에게 튀어 나가는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못하겠다고 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장기가 없다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어요.
리온이는 뭘 보여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지?”
담임선생님께서 물어보시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쳐다봤어요. 그 때 맨 앞에 앉은 승기라는 친구가 내 바지 주머니를 쿡 찔렀어요. 불룩한 바지 주머니 속에는 할머니께서 싸주신 약밥이 들어 있었어요.
저는 뭐든지 잘 풉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우리 할머니께서는 매번 매듭을 다르게 해서 간식 봉지를 묶어주시거든요. 그런데 봉지를 찢거나 가위로 자르면 왠지 할머니와의 게임에서 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궁리를 많이 하다 보니, 이제 어떤 매듭도 척척 잘 풀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이걸 장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잘 푸나요?”
앞에 앉은 승기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어요.
코를 잘 풉니다.”
말장난 선수인 명수의 말에 교실이 온통 웃음바다가 됐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친구들이 벌써 나를 비웃는 것 같았어요. 진짜 코나 한 번 세게 풀까 싶기도 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약밥이 들어있는 봉지를 꺼냈어요. 비닐봉지 입구는 매듭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요.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양손으로 매듭을 잡았어요.
잠깐만 리온아. 이게 얼마나 풀기 어려운지 알아야 성공했을 때, 친구들이 인정해주지 않을까? 선생님도 매듭이라면 좀 풀거든.”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마술 전에 관객들에게 이리저리 보여주는 마술사가 생각났어요. 선생님은 마술사처럼 약밥 봉지를 높이 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는 매듭을 풀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의 긴 손톱이 매듭 사이를 파고드는데, 풀릴까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매듭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여유가 넘치던 선생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어요. 결국 선생님은 다시 약밥 봉지를 주시고는 두 손을 들었어요. 친구들은 아까워했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약밥 봉지를 잡고 매듭을 풀려는데, 다시 심장이 마구 뛰고 손이 떨리는 거예요. 할 수 없이 나는 눈을 감았어요.
 
오오! 눈 감고 풀겠다는 거지?”
잠깐 감았다 뜰 생각이었는데 친구들은 내가 일부러 눈을 감은 줄 알았나 봐요. 나는 창피해서 다시 눈을 뜰 수도 없었어요. 오직 손의 감각으로만 매듭을 풀어야 했지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지 조금씩 마음이 안정됐어요. 가장 먼저 시작점을 찾아야하는데, 할머니의 매듭은 종류가 많아서 어디가 어딘지 헷갈렸어요. 나는 여러 유형의 매듭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손가락에 힘을 줬어요. 연꽃의 봉오리를 닮은 연봉매듭일까요? 생강의 모양을 닮은 생쪽매듭? 그것도 아니라면, ? 이것은 내가 한 번도 풀지 못했던 우물정자 매듭이었어요.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매듭이 걸렸어요. 나는 할머니께 배운 기억을 떠올리며 살살 훑어 내리듯이 양 끝을 위 아래로 잡아 당겼어요. 보기에는 묶는 것 같지만, 잠시 후 중앙에 아주 조그만 틈이 생겼어요.
나는 그 틈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요. 그때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어요. 친구들이 소리를 질러서 바로 앉았지만, 그 바람에 나는 다음 동작을 잊어버렸어요. 이마랑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요. 다시 손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좁은 틈으로 매듭 끝을 천천히 잡아 당겼어요.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드디어 매듭이 풀렸어요.
, 다행이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어요. 선생님께 약밥을 꺼내 드렸더니, 승기와 앞에 앉은 몇몇 친구들이 박수를 쳤어요.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기는 했지만 앞에 나왔던 친구들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어요. 할머니께 감사하다는 말도 꼭 전하기로 마음먹었지요. 매일 싸우기만 했는데 이렇게 할머니 덕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 다음부터 나는 진짜 편안하게 친구들의 장기자랑을 구경했어요.
 
오오, 컴온 베이비. 제법인데.”
쉬는 시간이 되자 승기와 몇 명의 친구들이 내 자리로 왔어요.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안했는데, 명수가 운동화 한 짝을 내밀었어요.
달리기 시합한다고 세게 묶었는데 안 풀려서 못 신겠다.”
매듭을 보려고 운동화를 가져왔다가 냄새 때문에 나는 고개를 돌렸어요.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한바탕 웃었고 멀리 있던 친구들도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 컴온. 오버하지마.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명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어요. 진짜 냄새가 나서 그런 건데 괜히 명수가 놀림을 받는 것 같아 미안했어요. 사과를 해야 하나? 그 때 일자 눈썹을 한 준서가 빙그레 웃더니 명수의 입을 막고, 코에 운동화를 갖다 댔어요. 명수가 진짜 구역질을 할 것처럼 날뛰었고,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명수는 창피해서 그런지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풀어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운동화를 받았어요.
 
승기가 발 냄새를 막기 위해 손을 뻗어 내 코를 잡아주었어요. 그 상태로 나는 매듭을 풀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끈 중심에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거예요. 이리저리 살펴보니 매듭 사이에 흙이 굳어 있더라고요. 운동화를 뒤집어 끈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바닥에 탁탁 털었어요. 매듭은 안 풀고 운동화만 터는 게 못 미더운지 명수가 몇 번이나 다가왔지만, 그때마다 준서가 말려줬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들의 기대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요. 꼭 성공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움직였어요. 승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코를 막아준 덕분인지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매듭이 어느 순간 툭, 하고 풀렸어요.
, 컴온 베이비!”
친구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어요. 나는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구름 위로 붕 뜬 기분이 들었어요. 친구들이 매듭을 확인하다 냄새를 맡고는 폭탄이라도 되는 듯 운동화를 서로 떠넘겼어요. 운동화가 돌아왔을 때 저도 얼른 다른 친구에게 넘겼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운동화가 날아갔어요. , , 이게 아닌데…….
누구야? 죽을래?”
운동화를 머리에 맞은 우민이가 벌떡 일어났어요. 우민이는 우리 반뿐만 아니라 4학년 전체에서 가장 덩치가 좋고 힘이 세기로 유명한 친구입니다. 우민이가 내 자리로 걸어왔어요. 옆에 있던 친구들도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기만 했지요. 나는 사과를 하려고 벌떡 일어섰는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앞에 있던 책상이 쿵하고 쓰러졌어요.
어쭈? 한 번 해보자는 거지?”
우민이가 성큼성큼 걸어서 내 앞에 섰어요.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명수의 운동화를 높이 치켜들었어요. 조금 전에 박수를 받게 해줬던 그 운동화가 이제 내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기 직전이었지요. 그때 마침 종이 울렸어요. 우민이가 성이 잔뜩 난 얼굴로 말했어요.
컴온, 학교 끝나고 좀 보자.”
나는 갑자기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온 것 같았어요. 풀기 전의 매듭처럼 갑자기 뭔가 꼬여버린 기분이 들었어요. 이런 건 어떻게 풀어야 하지? 수업 시간에도 멍하니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었어요.
! 컴온. 치료비는 못 주니까 각오 단단히 해라.”
우민이가 지나가며 말했어요. 나는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못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우민이의 눈치를 보느라 제 옆에 오지도 못했고요.
마지막 수업 시간이 되자 실컷 맞을 것인지 도망갈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어요. 초등학교에 와서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내가 학교에서 가장 힘이 센 우민이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도망가면 당장은 안 맞겠지만, 결국에는 더 맞을 테고 비겁하다고 소문까지 날 텐데 말이죠. 나는 어떡해야 할까요?
 
우민이가 뒤에서 지시하는 대로 가다보니, 낯선 다리가 나타났어요. 승기, 준서, 명수가 우민이 몰래 따라오고 있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멀리 천천히 흘러가는 강이 보였는데, 내 마음과는 달리 진짜 평화로워 보였어요. 다리를 다 건널 무렵 우민이가 앞으로 와서 다리 아래로 내려갔어요. 어쩌면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심장이 뛰는 속도로 달릴 수만 있다면 우사인 볼트가 쫓아와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어요.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섰는데,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도망가면 다시는 친구들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뒤돌아서서 다리 아래로 내려갔어요. 공터가 보였는데 우민이가 멈춘 곳은 다리 기둥 바로 옆이었어요. 그늘이 져서 어딘가 좀 으스스했지요. 당장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우민이가 가방을 던지더니 성큼성큼 걸어왔어요. 큰 주먹이 갑자기 날아왔어요.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지요. 그 순간 머리 위로 우민이의 주먹이 휘익 지나갔어요. 우민이가 약간 비틀거렸는데 이때다 싶어 주먹을 마구 휘둘렀어요. 한 대, 두 대, 세 대. 왜 이리 가벼울까요? 내 주먹은 우민이 근처에도 못 가고 바람 소리만 냈어요.
하하하, 뭐 하냐? 컴온!”
우민이가 멱살을 잡기 위해 팔을 뻗었고, 저는 고개를 숙인 채 우민이의 배를 향해 달려들었어요. 우민이는 살짝 피해 몸을 빙그르 돌았는데, 내 머리가 어느 순간 우민이의 두꺼운 팔뚝 안으로 쏙 들어갔어요.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그 기술, 헤드락에 걸린 거예요. 나는 양손을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움직일수록 목이 조여 왔어요. 나는 계속 팔을 저으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어요. 그 바람에 다리가 엉켜 휘청거리다가 우민이의 허리를 잡게 됐어요.
컴온 베이비!”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런데 그 말은 수없이 나를 놀리던 그 소리가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였어요.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면서 우민이의 허리띠가 눈에 들어왔어요.
나는 매듭을 풀듯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허리띠를 풀고, 바지 단추까지 열었지요. 우민이가 눈치를 채고 한 손을 바지로 가져갔지만, 내가 이미 바지를 내린 후였어요.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버렸어요.
끼약!”
누군가 외친 비명소리와 함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어요. 우민이가 바지를 올리는 동안 나는 헤드락에서 빠져나왔어요. 그 때 웃음소리도 들렸는데, 우민이가 아무리 둘러봐도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어요. 우민이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왔던 길로 정신없이 뛰어갔어요.
우와!”
컴온 베이비 만세!”
세 친구 외에도 몇 명의 여학생들이 다리 아래로 내려왔어요. 우민이한테 맞거나 놀림당한 친구들을 승기가 부른 거였어요.
너 진짜 끝내준다.”
이야, 뭐든 잡히면 다 풀어버리잖아. 다 덤벼. 컴온.”
갑작스러운 칭찬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날 이후로 우민이는 친구들에게 힘자랑을 하지 않았는데, 나만 보면 괜히 허리띠를 잡고 슬금슬금 피하더라고요.
별명이스탑보이라고 했나요? 고기서 님. 어딜 가도 이름 가지고 놀리는 친구들은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같이 놀고 싶거나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요. 민감하게 반응하면 재미있어서 더 놀리더라고요. 그러니까 먼저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나는 스탑보이다.’ 하고 말이에요. 그 후에 친구들에게 계속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하는 거예요. 한두 번 말고 계속 도와주면 기서님의 진심을 알고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한 번 해보세요. 별명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나 같은 겁쟁이도 해낸 걸요. 만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올릴 정도면 분명히 나보다 용감할 것 같아요. 스탑보이 님의 극복기도 기대할게요. 나중에 멋진 모습으로 만나요. 파이팅!
 
컴온 베이비가 스탑보이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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